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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이야기/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 그 폐지의 이유 PartⅠ

드디어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이슈가 2004년 9월 국회의사당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폐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좀 더 나이가 들어서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2000년 이후 본격적으로 폐지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줄기차게 주장하였던 (아무도 잘 모르셨겠지만) 저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국가보안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 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국가보안법1925년(大正14年:타이쇼 14년)에 일본에서 제정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ちあんいじほう)을 기반으로 1948년 12월 제정, 공포된 것입니다. 그럼, 이 법이 어떤 배경으로 제정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948년 8월 미군정에 의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1948년 4월 3일,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여 명과 그 동조자 1천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의 시작입니다.

이 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순천지구 주둔 제 14연대와 그 인근 주민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에 있어 남로당과 그 외곽조직은 이를 주도하거나 적극 가담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정부는 내란행위자 내지는 남로당원을 단속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것은 형법이 제정되기 5년 전입니다.

자, 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치안유지법 역시 비슷한 이유로 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활발해진 일본의 사회운동, 즉 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일어난 혁명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25년 제정된 법이 바로 치안유지법입니다. 즉, 두 개의 법은 제정된 배경과 제정된 목적이 같습니다.

1925년(大正14年:타이쇼 14년) 제정된 내용은 국체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의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와 행동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1928년(昭和3年: 쇼와3년) 공산당원 뿐 아니라, 그 지지자 그리고 노동조합, 농민조합 활동,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 참가자까지 적용되게 되었습니다.

그 뒤 1935년(昭和10年: 쇼와10년)에 치안유지법의 대상이었던 일본공산당 지도부는 괴멸하나, 이 이후 일본의 사법부는 종교단체, 학술연구 단체 등을 단속 대상으로 하여 천황제 파시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법은 1941년(昭和16年: 쇼와16년) 더욱 강력해져, 전65조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고, 특히 제3장 전26조에 걸치는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예방구금(予防拘禁:よぼうこうきん) 제도입니다. 이것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형을 받고 비전향인 채로 형기를 만료하여 출소한 자의 재범을 방지하기 위해 그 사람을 계속 구금할 수 있는 것으로 지방재판소 검사가 청구하여 재판소가 결정하기만 하면 바로 그 대상자를 구금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향이라 함은 사고적 정치적 입장과 신념을 바꾸는 것으로, 특히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탄압에 의해 그 입장을 버리고 다른 입장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많은 뉴스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이 예방구금은 2년으로 제한되나, 전향하지 않는 경우 갱신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미전향 공산당원은 형기 만료 후에도 일본의 패전까지 감옥에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악법 또는 자유사형법이라 불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치안유지법은 패전 직후 1945년(昭和20年: 쇼와20년) 10월 15일 GHQ(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지령으로 폐기되었습니다.

일본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치안유지법의 희생자는 체포에 의한 송치 75,681명, 기소 5,162명이나, 송치되지 않은 경우를 포함하면 10여만명, 질병 등의 이유로 옥사가 1,503명, 114명이 고문, 학대로 옥사, 65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출처: 1976년『문화평론(文化評論)』임시증간호)

자, 여기까지 훑어보고 보니, 두 법의 제정 배경이 같다란 점에 놀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실 것 없습니다. 이것은 같은 목적으로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입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 천황제 파시즘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미명하에 실제로는 이승만 정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탄압 대상은 모두 사회혁명을 주도하려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탄압, 또는 학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들이 사회주의자냐, 공산주의자냐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천황제 파시즘, 이승만 정권 등)을 해하려는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정부의 조선총독부는 그 치안유지법을 이용하여 조선에 있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과 시민개혁 운동을 탄압하였고 그에 의해 많은 이들이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위에서 희생자의 수에 정확히 조선인도 포함되어있는진 알 수 없습니다만, 1925년부터 1945년의 단 20년 동안 8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이 법에 의해 일본 검찰에 송치되고, 추정할 수 없는 수십만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 글은 저번의 담배에 대한 글보다 훨씬 긴 내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훨씬 재미없는 내용이 될 듯 합니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내용의 이미지도 없을 것이고, 모두 텍스트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재미없는 법에 대한 이야기고 재미없는 과거의 암울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과거가 아니고 지금도 현재입니다. 여전히 법은 발효되고 있고, 여전히 그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절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치안유지법에서 시작하여, 국가보안법으로 이어져 사회운동을 막아왔던 이 고리를 끊자는 의미에서 국가보안법을 반대하고 폐지를 주장합니다.


PartⅠ에서는 국가보안법의 제정 배경과 목적, 그리고 국가보안법의 시초라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의 제정 배경과 목적, 그리고 그 피해에 대해서 아주 간단히 훑어보았습니다. PartⅡ에서는 치안유지법의 전문과 그에 대한 해설, 그리고 국가보안법과의 비교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