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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이야기/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되는 법

국가보안법1925년(大正14年:타이쇼 14년)에 일본에서 제정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ちあんいじほう)을 기반으로 1948년 12월 제정, 공포된 것입니다.

1948년 8월 미군정에 의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1948년 4월 3일,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여 명과 그 동조자 1천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의 시작입니다. 이 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순천지구 주둔 제 14연대와 그 인근 주민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에 있어 남로당과 그 외곽조직은 이를 주도하거나 적극 가담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정부는 내란행위자 내지는 남로당원을 단속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것은 형법이 제정되기 5년 전입니다. 자, 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치안유지법 역시 비슷한 이유로 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활발해진 일본의 사회운동, 즉 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일어난 혁명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25년 제정된 법이 바로 치안유지법입니다. 즉, 두 개의 법은 제정된 배경과 제정된 목적이 같습니다.

1925년(大正14年:타이쇼 14년) 제정된 내용은 국체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의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와 행동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1928년(昭和3年: 쇼와3년) 공산당원 뿐 아니라, 그 지지자 그리고 노동조합, 농민조합 활동,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 참가자까지 적용되게 되었습니다. 그 뒤 1935년(昭和10年: 쇼와10년)에 치안유지법의 대상이었던 일본공산당 지도부는 괴멸하나, 이 이후 일본의 사법부는 종교단체, 학술연구 단체 등을 단속 대상으로 하여 천황제 파시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법은 1941년(昭和16年: 쇼와16년) 더욱 강력해져, 전65조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고, 특히 제3장 전26조에 걸치는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예방구금(予防拘禁:よぼうこうきん) 제도입니다. 이것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형을 받고 비전향인 채로 형기를 만료하여 출소한 자의 재범을 방지하기 위해 그 사람을 계속 구금할 수 있는 것으로 지방재판소 검사가 청구하여 재판소가 결정하기만 하면 바로 그 대상자를 구금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향이라 함은 사고적 정치적 입장과 신념을 바꾸는 것으로, 특히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탄압에 의해 그 입장을 버리고 다른 입장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많은 뉴스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이 예방구금은 2년으로 제한되나, 전향하지 않는 경우 갱신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미전향 공산당원은 형기 만료 후에도 일본의 패전까지 감옥에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악법 또는 자유사형법이라 불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치안유지법은 패전 직후 1945년(昭和20年: 쇼와20년) 10월 15일 GHQ(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지령으로 폐기되었습니다.

일본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치안유지법의 희생자는 체포에 의한 송치 75,681명, 기소 5,162명이나, 송치되지 않은 경우를 포함하면 10여만명, 질병 등의 이유로 옥사가 1,503명, 114명이 고문, 학대로 옥사, 65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출처: 1976년『문화평론(文化評論)』임시증간호)
이렇게 두 법의 제정 배경이 같다란 점에 놀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실 것 없습니다. 이것은 같은 목적으로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입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 천황제 파시즘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미명하에 실제로는 이승만 정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탄압 대상은 모두 사회혁명을 주도하려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탄압, 또는 학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들이 사회주의자냐, 공산주의자냐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천황제 파시즘, 이승만 정권 등)을 해하려는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정부의 조선총독부는 그 치안유지법을 이용하여 조선에 있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과 시민개혁 운동을 탄압하였고 그에 의해 많은 이들이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위에서 희생자의 수에 정확히 조선인도 포함되어있는진 알 수 없습니다만, 1925년부터 1945년의 단 20년 동안 8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이 법에 의해 일본 검찰에 송치되고, 추정할 수 없는 수십만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大正14年:타이쇼 14년)에 제정될 당시는 제7조, 1941년(昭和16年: 쇼와16년)에는 65조로 강화됩니다. 전자는 치안유지법(구법), 후자는 치안유지법(신법)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럼, 치안유지법(구법)의 법조항과 현행 국가보안법의 법조항을 살펴보겠습니다.

치안유지법(구법)
치안유지법(구법)은 국체를 변혁하거나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목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거나 가입한 자에 대해서 처벌하고 있으며, 그것을 선동하거나 협의, 여러 편의를 제공 또는 약속한 경우에도 역시 처벌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수한 자에 대해서는 죄를 경감 또는 면제시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법의 시행구역 이외에서 행해진 법에 대해서 처벌하고 있습니다.

치안유지법(신법)
신법은 구법을 구체화함과 함께 검사의 권한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방구금이란 조항을 25조나 추가하여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한정으로 구금할 수 있도록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국가보안법과 비교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치안유지법(구법) 국체를 변혁하거나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조)
국가보안법 국헌을 위해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그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1조)

치안유지법(구법) 전조 1항의 목적으로써 그 목적이 되는 사항의 실행에 관하여 협의한 자는.... 그 목적이 되는 사항의 실행을 선동한 자는.... (2조, 3조)
국가보안법 그 목적한 사항의 실행을 협의, 책동 또는 선전을 한 자는.... (3조)

치안유지법(구법) ...죄를 범할 목적으로 금원 기타의 재산상의 이익을 공여하거나 또는 그 신입 또는 약속을 행한 자는.... (5조)
국가보안법 본법의 죄를 범하게 하거나 그 정을 알고 총포, 탄약, 도검 또는 금품을 공급, 약속 기타의 방법으로 자진방조한 자는... (4조)

치안유지법(구법) 죄를 범한 자가 자수를 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6조)
국가보안법 본법의 죄를 범한 자가 자수를 할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 (5조)

치안유지법(구법) 본법은 하인을 불문하고 본법시행구역 외에서 죄를 범한 자에게 또한 이를 적용한다 (7조)
국가보안법 본장의 규정은 누구든지 본법시행지 외에서 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도 적용한다. (8조, 49년 개정으로 추가됨, 해외에서 일어난 일도 처벌하는 규정)

불행히도 치안유지법(신법)에 추가된 예방구금 제도는 보안관찰법이란 이름으로 유사 제도가 있습니다.

보안관찰법 제2조 (보안관찰해당 범죄로써) 3. 국가보안법 제4조, 제5조(제1항중 제4조제1항제6호에 해당하는 행위를 제외한다), 제6조, 제9조제1항ㆍ제3항(제2항의 미수범을 제외한다)ㆍ제4항

위 조항에 따르면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주요 범죄에 해당하는 제4조 (목적수행), 제5조 (자진지원, 금품수수), 제6조 (잠입, 탈출), 제9조(편의제공)에 대해서 보안관찰을 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안관찰처분을 면제받기 위해서는 보안관찰법시행령 제14조 (보안관찰처분 면제결정 신청등)에 따라 법령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해야합니다. 즉, 이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에 대해서 전향서를 제출하는 것입니다. 보안관찰법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보안관찰을 행하는 것과 치안유지법에서 예방구금을 하는 것은 방법적으로 조금 다를 뿐 거의 동일합니다.

즉, 지금 국가보안법은 1925년 제정된 치안유지법(구법)에서 시작하여 개정을 거쳐 1941년 개정된 치안유지법(신법)의 모든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괄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법입니다. 아니 1925년부터 지금까지 치안유지법은 이름만을 바꾸어 국가보안법이란 이름으로 체제수호라는 미명하에 유지되어 왔습니다. 안유지법과 국가보안법은 그 목적과 처벌, 형 집행 후에도 구금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합니다. 유일하게 차이가 있다면 국가보안법 제1조 제2항에서 헌법상에 보장된 기본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지 않도록 하는 조항이 추가된 정도입니다.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최대의 조작 사건으로 유명한 것은 진보당 사건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입니다. 진보당 사건은 1958년 1월 11일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 부위원장 박기출, 김달호, 간사장 윤길중 등 간부 10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 및 조봉암, 양이섭을 다음해 7월 31일 사형 집행한 사건입니다. 그 외에도 23명을 추가로 국가보안법, 간첩죄, 간첩방조죄 등으로 구속기소하였습니다.진보당은 1955년 12월 12일 발기하여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216만 표를 획득하여 1년도 안되는 사이에 강력한 제2야당으로 발돋움한 정당이었습니다. 진보당이 어떤 정당인지는 그들의 발기취지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적 성업인 삼일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금 환기 계승하며, 우리가 당면한 민주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이에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의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고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의 꿈은 국가보안법과 이승만 정부, 그리고 그것을 방관한 당시 제1야당인 민주당에 의해 무산되었으며 조봉암 위원장과 양이섭은 사형을 당하고, 진보당 역시 해산되었습니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이보다 더욱 처참합니다. 최근 TV의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국가보안법과 관련하여 몇번 다루어진 바가 있는 인혁당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주장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간첩 김상한이 1962년 1년 인민혁명당을 조직, 1972년 7월 4일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1973년 10월 이후 학원소요와 유류 파동, 개헌청원 서명운동 등이 일어나자 인혁당을 재건,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민혁명당 관련자들은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관련자 21명에 대해 세번의 재판을 거친 뒤 서도원 등 8명에게 1975년 4월 9일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1974년 5월에 검거 후 11개월 동안 모든 재판을 마치고 그에 대해서 사형이 집행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추후 모두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였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의 이유로 입지가 약해있었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간첩 사건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 방법은 그 뒤로 박정희 정권을 이어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노태우의 두 군사 정권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같은 방법으로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있었습니다. 1985년 9월 9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은 많은 수의 유학생을 간첩에 의해 포섭되어, 간첩단으로 몰았습니다. 이때 김성만, 양동화, 황대권씨 등은 감금, 고문 조사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지금까지도 많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수 많은 사건이 조작되었고 그에 의해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실태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 등을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시간을 내서 조사해보면서도, 몰랐던 사실이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피해를 입었어야만 했고, 그로 인해서 눈물을 흘렸는가. 그것을 생각하면 제 스스로도 치가 떨릴 정도입니다. 어렸을 때 TV를 보면서 "에이 저런 나쁜 x들 간첩이라니!"하고 분노했던 사건들 모두가 국가보안법을 통해 조작된 사건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들이 아직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 하고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존속시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볼 때, 이 느낌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은, 법 자체의 법리적인 문제점 뿐 아니라, 정치적, 역사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법이 문제니까 고치면 그만이 아닌가? 라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처음 태생부터 만들어질 필요가 없었고, 지금 현재도 그다지 필요 없는 법입니다. 형법보다 먼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던 법이 국가보안법이고, 형법에도 국가의 안전과 안보를 위한 내용은 모두 그 뒤에 추가되었습니다. 1948년 제정된 뒤로도 수도 없이 폐지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나, 계속되어 정권은 이 법을 이용했고 60년(또는 84년)이 지난 지금도 이 법은 남아있습니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과 조선에서 사회운동가와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1948년부터 현재까지도 민주 인사와 반독재 인사를 탄압하고 있는 법이 국가보안법입니다. 반민주주의적인 상징성이 국가보안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쪽은 폐지를 주장하고, 한쪽은 존속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개정은 존속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개정을 통해서 국가보안법은 이름만 있고 약화된 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상징성은 계속 남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필요가 없던 법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반민주주의적인 상징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도 폐지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폐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폐지가 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역사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지워지지 않는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포스트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