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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을 주웠어요.

Namu(南無) 2007. 9. 16. 15:53
다음주초에 프로젝트의 중대한 일정이 있어 얼마만인지 잘 기억이 나지도 않는 주말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원래는 훨씬 일찍 일어나 씻었습니다만, OCN에서 방송하는 "이브의 유혹"을 보다보니 시간이 많이 늦더군요. 주섬주섬 짐을 챙겨 집을 나와 버스를 탔습니다. 텅 빈 버스. 일요일 오후의 느긋함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제 지정석이라 할 수 있는 맨 뒤에서 한 칸 앞의 오른쪽 창가. 가장 편하죠. 도로가 가운데로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버스가 살짝 오른 쪽으로 기울고 그래서 오른쪽 끝자리가 창에 기대기 좋습니다. 그리고, 맨 뒷자리 바로 앞이 앞뒤 간격이 가장 넓어서 편하죠.

그런데, 자리에 핸드폰이 하나 놓여있더군요. 바로 이 핸드폰입니다.
LG Cyon SV-590 쵸콜렛 블랙 라벨 폰입니다. 터치 패드에 작고 아담한 크기가 이쁩니다만, 폰은 꽤 외상을 많이 입었더군요. 잔 상처가 많았습니다.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단축 번호 1번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저를 반기는 비밀번호 입력 화면 힌트는 "ㅗ-_-^즐~"이었습니다. 순간 깨달았죠. 이거 남자 핸드폰이구나, 하고요. 기대에 가득찼던 제 마음에는 먹구름이 끼었습니다. 하지만 찾아줘야 하니까 단축번호를 뒤져서 동생이라 등록된 번호가 있어서 제 핸드폰의 숫자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다들 가족이나 친구들을 애칭으로 많이 입력하시는 거 같더군요. 아빠, 엄마, 동생, 형, 오빠, 언니. 그런데 제 핸드폰은 모든 사람은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이름, 어머니 이름, 동생 이름, 여자 친구 이름. 이상하더라고요, 이름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전화를 했더니 누구시냐고 묻더군요. 제가 그래서 010-xxxx-xxxx 폰의 주인의 동생분이시냐고 물어보니 맞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죠. 버스에 탔더니 폰이 있어서 단축 번호를 확인하고 연락하는 거다, 하고요. 폰의 주인은 제가 사는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월계동에 거주한다고 하더군요. 바로 갖다주고 싶었지만 일이 있어 저녁 때 다시 연락하겠다고 끊고 사무실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도 한번 택시에 핸드폰을 내리고 온 적이 있었지만 영영 찾지 못한 우울한 기억이 있습니다. 택시 기사가 처음에는 전화를 받더니 나중에는 씹더군요. 싸구려 폰인데. 5000원 주고 산. 쳇 하고 5000원 주고 또 샀습니다. 그리고 저번엔 여자 친구랑 데이트 도중 폰을 놓고 내려서 차고지까지 가서 찾은 적이 있고요. 분실폰을 거래하는 블랙 마켓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좋지 않아요. 잃어버린 사람은 돈의 아까움보다 당장 연락할 수 없고 받을 수 없는 불편함과 연락처가 따로 없을 경우의 괴로움이 다가오거든요. 그러니 잃어버린 폰은 꼭 찾아주도록 하세요.

집에 들어가려면 더 늦은 시간이어야 하니, 죄송스럽지만 핸드폰 주인분 천천히 기다려주세요. 아, 여기서 정말 안타까운 것은 아리따운 아가씨이길 바랬는데 시커먼 남자일 거 같아서 우울합니다. 흑.